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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blogimgs.naver.com/nblog/ico_scrap01.gif" class="i_scrap" width="50" height="15" alt="본문스크랩" /> [이 時代를 논하다] 황석영·이문열

방랑구름 2006. 3. 15. 07:27

1.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이제 우리 누구를 편들지 맙시다"

 

 

진보 진영의 황석영, 보수 진영의 이문열-. 우리 시대 최고의 논객인 소설가 황석영(60)씨와 이문열(55)씨가 만났다. 갈기갈기 찢어진 이 시대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손해 보더라도 나서겠다"고 작정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얼핏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은 두 사람의 얘기는 일정 지점에서 수렴되는 듯했다. 우리 사회 통합의 실마리가 황석영-이문열 두 논객의 대담에서부터 풀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대화록을 5회로 나눠 싣는다. 진행은 본사 정운영 논설위원이 맡았다. - 편집자

사회=정운영 논설위원


사회:소개가 필요 없는 두 분에게 '아주 특별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두(冒頭) 발언을 하시지요.

황석영:이문열 형은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동료 작가예요. 나이 차는 5년이 나지만 이 시대에 저런 작가가 없으면 서운하다 싶을 작가입니다. 때때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갈등이 없어요. 이형이 유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나이가 위인 사람에게 깍듯해요. 나는 그런 점에서는 무심한 편이거든.

이문열:황선배는 단순한 문단 선배가 아니라 내가 문학적으로 많은 지도와 도움을 받은 선배입니다. 깍듯하지 않을 수 없죠. 다른 데서도 얘기했지만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거리가 있다면, 거기는 내가 선택한 것도 있고 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떠밀려가서 그렇게 된 것도 있습니다.

황: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꼭 6.25 때 길바닥에서 잃어버린 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나는 문단에서 기회주의자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이형은 소신 있는 사람이에요. 이제 진영이고 뭐고를 앞세워 논쟁하지 말고, 되도록 같은 쪽을 바라보고 어떻게 하면 화합할지 그런 걸 고민해야 돼요.

이:황선배를 처음 뵌 게 1981년 대구에서 고은 선생 하고 함께였는데, 그 자리에 몇 안 되는 내 편 중의 하나였어요. 내가 보수 반동이라고 의심받고 있을 때라 분위기가 나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황선배하고 김지하 선배 두 분이 이런 사람 말도 들어야 한다고 주위를 설득하더라고요.

황:자꾸 우리를 대치점에 갈라놓으려고들 하는데 우리는 새로 화해할 게 없어. 허허허.

이:우리가 언제나 일치한 것은 아니지만, 분열에도 분열의 방식이 있는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방식은 아주 불쾌하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사회:근자에 우리 사회를 들끓게 만든 송두율 교수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황:송두율이 분단의 희생자라고 변명했더니 양쪽에서 난리가 났어요. 한쪽에서는 너도 똑같은 놈이라고 대들고, 한쪽에서는 왜 그를 전향시키려고 하느냐고 아우성이야. 송두율 문제는 우리 사회가 성숙했으면서도 자기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봐요.

이:그 양반의 저서 하나 읽은 것이 없어서 송교수 사건에 긴 얘기는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더 모호하게 되는 거라.

황:내게는 남북이 활용한 거 같애. 송두율 사건은 공안 당국으로서는 성공한 작품이야. 저쪽도 더 보호하고 이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황선생님도 93년에 비슷한 고민을 하셨을 텐데요.

이:황선배가 국내에 들어오기 한달반 전 우리가 뉴욕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안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곧 들어왔잖아요. 그때 신변 안전에 어떤 언질을 받았어요, 아니면 벌받는다는 각오로 들어온 거예요?

황:두 가지 다예요. 그때 이미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추진 사실을 알았어요. 나한테 도와달라고 정부 쪽에서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 정상회담이 성사됐으면 한 2년 살고 나올 줄 알았지요. 주범인 문익환 목사가 3년반을 살았으니 나는 그것보다 적게 살겠지 하고 들어왔지.

이:황선배가 빨리 들어온 이유가 송교수가 들어온 이유를 설명할지 모르겠는데, 혹시 잘못된 정보를 받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요?

황: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모대학에 자리가 났다는데 거기서 말년을 보내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 사람 정말 가난하게 살았어.

이:그래서 돌아오려고 했더라도 들어와서 오락가락한 것은 너무한 것 아니에요?

황:너무하기보다는 잘못이 크지. 공항에서 털고 들어왔어야지. 며칠 전 독일에서 통일 운동하던 간호사들이 들어왔는데 하는 얘기가 어처구니없다는 거야. 그럴 거면 떠나면서 밝혔어야지 그러더라고.

이: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이라는 느낌이에요. 화해라는 말도 좋지만 잘잘못이 먼저 가려져야지요.

황:국정원과 검찰이 불구속 상태에서 출퇴근 형태로 수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의 국적이 외국이기도 하지만 참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노동당 입당 같은 일을 당시는 몰랐더라도 오늘 돌이켜볼 때 무슨 낌새 같은 것이 없었습니까?

황:없어요. 범민련 하고 남북이 공개적으로 3자 회담을 하는데 한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만나 술은 먹지 외로우니까. 이형하고 나하고 뉴욕에서 술 마시듯이. 공개적인 행사라든가 선언문 같은 데 한번도 사인한 적이 없어요.

사회:이렇게 밝혀지니 혹시 섭섭하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황:어처구니가 없는 거야. 91년인가 내가 북에 갔을 때 송두율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이지만 이 사람이 그럴 위인이 못돼. 저렇게 헤매는 것도 소심하고 우유부단해서 그래. 독일 국적 포기한 뒤 영구 귀국 선언하고 전향해, 그렇지 않으면 지식인으로서 못 살아난다면서 정수일 선생 예를 들었어요. 그 분은 자신의 학문을 지키기 위해 다 던져버렸다고 그랬지요. 이번 기회에 국가보안법을 과거와 같이 그대로 온존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때가 됐다고 봅니다.

이:그런 결단의 시기를 놓치는 것 같아요.

사회:송두율 사건의 설득력 있는 해결 방향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처음에 나는 아주 불쾌했습니다. KBS 같은 데서 너무 띄웠어요.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것도 그래요. 그런 식이면 히틀러는 왜 용서 못하고 유신 체재는 왜 못합니까? 간첩 혐의로 체포하겠다는데도 들어와서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진상은 거의 드러난 것 같고. 자꾸 더 큰 반성문만 요구할 게 아니라, 그 진상을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결정할 때가 된 듯합니다.

황:공소 보류 정도로 살려야지. 검찰 태도는 너무 짓밟는 것 같애. 탈당 성명 하면서 이미 저쪽하고 끊어진 것 아니에요. 그랬으면 여기서도 그 정도로 끝내고, 필요한 사람이니까 데리고 사는 게 좋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함께 살자는 데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달리 송두율씨에게만 가혹할 까닭은 없지요. 만경대 정신으로 통일하자던 사람도 버젓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사회:시대에 따라 변하는 역할도 있고 변하지 않는 역할도 있을 텐데, 이 시대의 지식인은 특별히 어떠해야 합니까?

황:지식인으로서 작가는 사람의 삶과 관계가 있으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종교인이나 언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사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폐지해야 한다, 전쟁은? 반대해야 한다. 이런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편이 아니라 힘없고 말 못하는 편에 서야 합니다.

이:보수와 진보의 구별만큼이나 지식인이라는 개념도 없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날처럼 지식이 소수에게만 독점되지 않고 고급 교육이 일반화되어서 독자 중에 유식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식인이란 말보다는 사회의 여론 형성에 기여를 하거나 영향력 가진 사람들 정도가 더 정확할 텐데.

황:한때 이형보고도 문화 권력이니 뭐니 했는데 그만큼 대중적 영향력이 있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이:지식인의 기능이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무로서 균형 감각 같은 것이지요.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를 편들어 균형과 조화를 회복시키는 역할과, 사회 전체의 안위와 복리를 증진시키고 그런 체제와 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역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편든다면, 그것은 균형 유지와 사회 방어라는 전제 아래 편들기가 이뤄져야 합니다.

황:이제 우리 누구를 편들지 맙시다. 문학으로써 글쓰는 것으로써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에 영향을 주도록 하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작은 갈등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이:시의(時宜)성 이슈에 자꾸 간섭하다가는 작가가 상할 가능성이 크고, 또 이념 대립으로부터 문학이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학생 시절에는 믿지 않았는데 이제는 믿게 됩니다.

황:나는 요새 와서 굉장히 자유스러워졌어요.

이:자유로워지는 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갈수록 묶이는 곳이 늘어나는군요.

 

03.10.24

 

 

2. 좌우 대립각 허물기

"소모적 편가르기…중간 목소리 다 죽어"

 

 

 

한창 대담을 진행 중이던 지난 22일 늦은 밤, 경계인 송두율의 구속 수감 소식이 들려왔다. 황석영은 "두번이나 사과하고 반성문까지 제출한 상황에서 너무 짓밟혔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고, 이문열은 "우리의 이념 방어기제가 너무 가혹하게 작동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거푸 술잔을 비웠다. 얘기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편가르기로 옮겨갔다.

사회:한국 문단에서 두 분을 보수와 진보의 대표주자로 여기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황석영:나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일반 노조를 뛰어넘어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에까지 설 수가 있느냐. 현재 대기업 노동자는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노동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 보수라고 할 때 과거 군사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던 사람들이 보수인가? 이건 아니란 말이오. 우리가 볼 때는 보수는 김구 선생이 대표일 거요. 한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다시 새롭게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이문열:예전에 고민했던 일 중에 가장 난감했던 것이 보수란 규정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걸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수 속에 다 우겨넣었습니다. 말하자면 진보가 아닌 것은 모두 보수가 되어 현대사의 악역(惡役)들까지 다 그 속에 받아들여야 했지요. 나도 처음에는 기꺼이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 부분이 아주 고약한 부담이 되더군요. 마찬가지로 진보로 불리는 것들도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어요.

황:진보의 한 획인 '극좌'는 북에 있고, 여기는 파시스트와 자유주의자들이 있어요. 이형이나 나는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해요. 자유주의자 중에 성질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개인의 자발성과 생존권이 내외의 요인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제한돼 있는 것이 북한 체제입니다. 그것을 보고 남한의 자유주의적 작가나 지식인들이 어떻게 용공좌파가 되겠소? 친북은 말이 되겠지만.

이:그것은 하나의 태도니까. 친북적이라고 하는 말과 예전에 누구를 빨갱이로 몰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황:북한 사람들도 안을 수 있으면 안아야지. 툭하면 북에 가서 살아라 하는데 이런 선택과 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별 관계가 없어요.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가 다양하게 변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해요. 각종 욕망과 생각과 자유가 멋대로 분출되는 마당에 보수냐 혁신이냐의 주제가 사실은 소모적인 틀이거든.

이:모든 사고 형태를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것 자체가 편의주의적 발상입니다. 구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바람에 여러 종류의 중간 목소리가 죽어버린 것이지요.

사회:그럼에도 근자에 우리 사회에 보수와 진보 논쟁이 한층 격해지는 게 사실 아닙니까?

이:보수.진보에 관한 우리 사회의 논의가 이렇게 뒤틀리게 된 것은 적(敵) 개념의 변화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적 개념이 확대되면 결국 나하고 똑같은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되는데…, 예를 들면 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웬만하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는데, 그 뒤 이념적으로 첨예해지면서 군사정권에 같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바로 군사정권을 찬동하는 나쁜 놈이 돼버렸지요. 적 개념이 확대되면 피차 격앙되니까 실제 이상 과장돼 표현되기도 하고요.

황:내 기억에 이형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보지 못했어. 젊은이들이 집 앞에서 책을 불태우고 했다는데 이것은 옳지 않아요. 가족사로 보더라도 시대의 아픔, 분단의 아픔을 담고 있는 이형의 작품이 많지요? 물론 이문열씨가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막 나가니까 자극을 받을 수는 있었겠지. 그러니까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작품에 전념하면 좋았을 걸.

이:80년대는 이념 지향적이었지요. 대의명분이 중요했고요. 지금은 오히려 탈이념적이 되면서 속된 정치화가 판을 치고 있어요.

황:나는 근년에 우리 사회가 너무 공론에 급급하고, 거기 집착하려는 목소리가 커지는 느낌을 받아요.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대중의 삶과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택시를 타면 운전사들이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이리 야단이냐고 물어. 보수고 개혁이고 다 귀찮다는 거야.

사회:그런 일이야 예전에도 있었고 특별히 새로운 현상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인터넷은 우리 경험에 새로운 광장인데 그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그 광장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고 자기 의견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쌍방향성의 함정이지요.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결정에는 나도 참여하고 동의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전문화되고 특정한 의도를 가진, 그리고 준비된 소수에 의해 조종 또는 조작당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황:인터넷의 영향이 대단하지요. 긍정적으로는 탈권위에다가 아무나 저 하고 싶은 얘기를 막 하는 시대가 됐어요.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이라면 양쪽이 대체로 편가르기식의 이념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점이에요. 전문으로 그 일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 욕설도 너무 많고.

이:그걸 보고 있으면 몹시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요. 예전에 히틀러의 나치스도 그랬고,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그런 광장을 이용했어요. "지금 모두 조국을 위한 성전에 나가는데, 그래도 제 한 목숨 아까워 빠지고 싶은 비겁한 녀석은 빠져라." 그러는데 어떻게 빠지겠어요? 아무도 못 빠지지요. 그래서 지원병으로 남양군도에 끌려가 죽으면서도 자신은 자원출정했다고 믿는 게 그렇습니다. 인터넷이 그런 함정을 계속 악용할수록 사회는 점점 파시즘으로 치닫게 되지요. 거기다가 더 위험한 일은 이쪽 못지않게 저쪽 상대편도 그걸 악용한다는 점이지요.

사회:두 분 말고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보수와 진보는 문제가 안 되나요?

황:수평이동의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견해 차이는 분명히 있지요. 한쪽은 파시즘, 한쪽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이념은 이제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형의 지적처럼 과거의 친일이나 군사독재를 보수로 칠 게 아니라, 미래의 전향적인 입장으로 사고의 수평이동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사회:정부와 사회 일각에 '편가르기'식 조중동 비판이 있는데요.

황:사회 현상으로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조중동 트라이앵글로 묶어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이:메이저 신문 고사작전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세 신문을 함께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태도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황:특정 신문을 지칭해 미안하지만 조선일보가 취했던 각종 편파적인 보도와 행동은 사회의 진행 속도나 진전 상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 조선'이라는 것이 나온 모양인데 나는 기본적으로 안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안티와는 거리를 두고, 안티를 젊은 세대가 빚어내는 사회현상 정도로 생각했으나 그 뒤 진행되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안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안티 조선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당착이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부조리한 시대에 번성했으면서도 아직까지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게 죄가 된다면 말이 되지만, 그들 주장대로 과거의 보도 내용이나 편집 태도만을 문제삼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데가 많아요. 예를 들면 그들이 이를 가는 5공화국과의 관계만 하더라도 파렴치했던 나팔수 신문을 응징하자면 과거의 K.S신문부터 해야지요. 내가 특별히 조선을 편들 이유는 없지만, 그런 점으로만 보아도 안티 조선 운동이 그리 온당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황:그 신문들은 바뀌었잖아.

이:바로 보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지요. 조선일보를 야단치면서 과거 행적을 끌어들이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쟤들은 바뀌어 이번에는 권력을 잡은 우리 편이 되었는데, 왜 조중동은 바뀌어 우리 편이 되지 않느냐고 몰매를 주는 거라면 말이 되지만.

황:내가 듣기로는 조선일보 내부에 젊은 기자들의 변화 요구가 상당하다고 해요. 조선이든 어디든 정치권력이 잘못됐을 때 과감하게 비판할 건 하고 사회 양쪽의 여론을 다 수렴하는 그런 신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이라크 파병 현안에 대해 어떤 의견이십니까?

황:작가로서 나는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 절대 반대야.

이:저는 절대 반대는 아니고 조건부 찬성입니다. 국익이나 명분이 확보되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조건은 정치적 산술의 문제인데 논란이 많겠지요. 하지만 둘째 조건은 전원 지원병으로만 파견한다면 어느 정도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하게 고쳐야 할 병 하나만 골라주십시오.

이:말 좀 조심해 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일부 정치가만 그랬는데 이제 모두가 너무 함부로 쓰는 것 같아요.

황:슬로건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가 올해의 내 화두인데 나 스스로도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정치적 슬로건의 홍수예요. 그건 껍데기인데.

이:함부로 쏟아내는 말의 홍수 속에 슬로건까지도 모두 휩쓸려 내려가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도도한 막말의 탁류….

03.10.26



3. 북한의 벽을 말한다

"요즘 남북 교류는 단합대회 수준"

 

 


황석영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북한 체제는 두 가지 얼굴로 봐야 합니다. 먼저 감동적인 부분은 전쟁 때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할 만큼 철저히 파괴된 상태에서 북의 남녀노소가 복구한 자생적인 생활력입니다. 아무튼 내가 가보았던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자급자족해서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물샐 틈 없는 사회 통제인데 이것은 가위 절망적입니다. 사회 전체가 일종의 농성이 계속되는 통제 체제라고 보면 되겠지요"라고 말을 보탰다. 이문열씨와의 북한 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회:북한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는 남한에서 한때 생사를 가르는 살벌한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두 얼굴…. 감동과 통제 얘기가 쉽게 다가섭니다.

황석영:어린아이까지 나서서 한장 한장 벽돌을 나른 전후 재건 과정은 눈물겹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는 듯합니다. 흔히들 수용소를 말하지만, 북한에는 수용소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어요. 도시에 살던 사람을 벽지의 집단농장으로 보내면 고생스러워 몇 년 못 살고 죽겠지요.

이문열:내 선친도 수용소가 아닌 지방 농장으로 보내졌다고 들었어요. 국경 근처의 평농장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아오지 탄광' 광원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북한 사회는 한마디로 관절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직맹이나 여맹.사로청 같은 당 외곽이나 말단 마을의 리당 세포까지 중앙당의 완전 통제 아래 있거든요. 결국 말단의 작은 일부터 중간 단위의 제법 큰일까지 위로만 올라갑니다. 과부하가 되니까 사지가 굳어버리고 심장에 이상이 오지요.

사회: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이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요. 밖으로는 서방의 봉쇄와 안으로는 철통 같은 통제가 서로 상승되어 굳어진 체제지요. 지방의 리당이나 협동농장 같은 '관절'에 재량권이 있으면 중간에서 한번씩 걸러주거나 풀어 주는데 그렇지 못해요. 재량이 없으니 항상 '1백% 달성' 따위의 허위 보고가 만연하는 거라.

이:나는 북한에 접근하는 남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한 말씀 드리지요. 동질성 회복을 위한 것이든, 문화 교류를 위한 것이든 남한 사람이 북한에 많이 가고 자주 만나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대부분은 교류나 동질성 회복이 아니라 일종의 단합대회를 하는 것 같습디다. 맨날 가는 사람만 가고, 저들과 따지고 싸울 것이 없는 사람만 가니 친목이나 도모하고 우의나 돈독히 하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황:설사 이형이 보는 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쳐도,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어요?

이:문제는 그것이 반복적이고, 또 그 때문에 자기검열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갔다온 사람 중에는 이렇게 하면 북한이 나를 안 볼 거다,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다시 나를 안 부를 거다 식으로 자기 검열을 하는 것을 더러 보았습니다. 다음 방북자 명단에서 자기를 빼는 것이나 방북을 거부당하는 것을 이상하리만치 걱정하더군요.

사회:방북이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닌데….

이: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문화계 사람이 더 그렇던데요. 내가 아는 어느 작가가 솔직히 고백합디다. 애초에 북한에 갔던 것 자체가 교류라기보다는 차라리 단합대회나 현지 학습이더라고요. 이산가족 상봉 같은 절박한 현안조차 그저 하나의 행사로서 자꾸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황:남북 관계의 특성상 국가가 행사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북쪽 사람들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 곁에 가족끼리 있으면 가만 있다가도, 누가 나타나면 장군님, 장군님 하고 야단이잖아. 대구 유니버시아드 행사 때 김정일 초상화가 비 맞는다고 난리치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의 순화된 감정들을 다 잊어버렸다고 할 만큼. 그런 것을 이해하자 이겁니다. 역으로 거기 감동을 받거나, 그래서 저쪽 체제가 우리보다 낫다고 할 사람은 남한에 하나도 없을 것 아니오?

이:그런 낙관론에 기초한다면 할 말이 없는데, 현실이 그렇게 낙관이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지요.

황:그 뒤에 남측 사람들이 평양 가서 그랬대요. 당신들 초상화 떼어내는 소동 때문에 모처럼의 대회 의미를 다 날려버렸다고. 그랬더니 북측 일꾼이 웃더래. 어린 여학생들이 거기가 평양하고 똑같은 줄 알고 그런 모양이라고.

이:선배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류든, 일체감 조성이든 서로 상이한 문화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만남 아니겠습니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되풀이해 만나봤자 단합대회밖에 안될 겁니다.

황:아니 몇년 전 사회단체들 방북할 때는 자유총연맹이나 상이군경회 등 고루고루 방문한 걸로 아는데. 저쪽은 개인이 자기 생존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이미 아니에요. 유엔에 의하면 지난 십여년간 2백만~3백만명이 서서히 죽어갔다고 해요. 지도원이란 사람이 생필품 부족으로 겨울에 속옷도 못 입어. 전기가 모자라 출퇴근할 때는 아파트 주민이 동시에 모여 하루에 두 번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해. 10층, 20층까지 온 가족들이 식수를 길어 나른다고 해요.

사회: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을 좀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이:황선배의 대북관은 남한 체제가 우위라는 굉장한 낙관 위에서 시작하는데, 그런 논의에는 왠지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그런 낙관이 근거있는 것이라면 그것부터 대중에게 믿게 해주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불안해하게 마련입니다. 주머니에 현금 몇 푼 있는 건달이 깡패에게 얻어맞을까 겁나 주머니를 털어주면서 크게 인심쓰는 척하는 꼴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그 낙관에도 그리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생존의 에너지를 저장하는 방식이 다를 뿐 생존경쟁에서의 우위는 어느 쪽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 한두개만 있어도 남한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될 판인데….

황:핵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것은 이제 별 의미가 없어요. 미사일이 있잖아. 남한이나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위치가 다 나와 있어요. 미사일로 핵 발전소를 때리면 그게 곧 핵 공격이오.

 

 

사회:그러니 핵 개발을 놔두자는 말씀은 아니지요?

황:내 얘기가 뭐냐 하면 핵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를 따지기 전에 평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북이 저렇게 떼를 쓰는 것은 오로지 미국에 관계개선을 해달라는 줄기찬 요구예요. 나는 이번 6자회담의 성사와 진행을 보면서도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평화 체제로 가기 위해 노력하자, 그런 생각이 잘못인가?

이:평화체제 정착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법론이나 그 결과의 유용성을 강조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빠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부적 일치, 남남 갈등의 해소가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방법밖에 선택이 없으며 또 그것은 틀림없이 이뤄진다는 믿음과 낙관부터 먼저 줘야지요. 소위 좌파든, 친북 인사든 이른바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이 그것입니다.

황:나는 친북이냐, 반북이냐 하는 용어도 버리고 싶은데….

이: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나는 친북이란 말 때문에 소송 당했는데 "안티 조선을 먼저 시작한 것이 북한이다"고 한 말이 "안티 조선은 친북이다"로 비화되어 명예훼손을 했다는 것입니다.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씁쓸하더군요. 친북과 반북은 하나의 태도이고,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의식도 크게 변했어요. 친북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명예가 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친북적이라는 말이 더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로 비치기도 하지요.

황: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지고 유연해진 것 아니오?

이:자유로운 사고, 개방적인 사고를 누가 탓합니까. 거기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이전과 다른 방법을 도입하려 한다면, 그 방법이 안전하고 효율적이라는 믿음을 먼저 심어줘야 하지요. 내가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우익의 입장은 그렇게 편한 것 같지는 않습디다. 남한이 정말 그렇게 우월하냐? 이 대답에 자신이 없는 거지요.

황:또, 또 자기를 우익이라네. 그런 논리로 내가 이형과 반대로 좌익이 되는 손해를 감수하게 되잖아. 생각 좀 해봐요. 저쪽 후방 철책선을 뜯고 금강산에 들락날락하고, 육로로 1천5백명이 평양 관광하고. 얼마나 달라진 거요?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이자고.

이:그 길이 다 북한의 속도전 루트래요. 하하하.

황: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네. 허허허.

사회:그래서 북한에 대한 남한의 태도가 어째야 합니까?

황:북이 변화하려면 변화할 조건을 줘야 해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이런 얘긴 섣불리 하고 싶지 않지만 북한이 개방한다면 해주 공단이든, 압록강 특구든 남한의 경제권에 편입되어 버리는 거요. 외국인 노동자 데려오고, 중국 가고 베트남 나가고 난리인데, 북은 언어도 통하고 노임도 쌉니다.

이:북한이 내국 식민지 꼴이 난다면 저절로 망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일이지요. 멀쩡하게 처음부터 그 조건으로 일하러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차별대우라고 난리치는데.

황:그쪽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외부의 책임도 크다고 봐요. 언젠가 미국 기자들한테도 얘기했지만 미국이 관계 개선하고 시간을 좀 주면 우리가 변화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이오.

사회:민족 공조 얘기입니까?

이:지난해부터 이상한 기류가 하나 흐르고 있어요. 사람을 가장 쉽게 동원하고 크게 감동시킬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민족주의인데, 요새 그 민족주의가 너무 값싸게 팔리는 것 같아요. 촛불시위에도 축구 시합에도 그 민족주의가 너무 기승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황:좀더 멀리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애석하고 씁쓸한 얘기지만,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는 판을 보면서 특검이니 뭐니 하는 게 누구한테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이 생기더라고. 결과적으로 대북송금 특검은 소모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쥐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 게 아니었는지.

03.10.27



4. 문학은 힘이 세다

"작가의 권력 비판은 숙명이다"

 

 

"젊은 시절 나는 문학이 사회나 정치하고 무관한 가치체계라는 주장에 굉장히 매력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도 그런 문학을 하며 늙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이문열씨가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이에 황석영씨는 "과거 독재 시절에 민주주의적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려던 문인들의 행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셀 수도 없는 시민단체가 하도 많아서 우리네야 작품으로 열심히 쓰고 발언하면 되겠지요"라고 말을 받았다.

사회:작가로서 가장 이상적인 현실 참여(engagement)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해석의 문제겠지만 소위 개혁지향적인 사람들한테는 내가 불만스러운 작가일 수도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같은 작품이 그렇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글을 쓰면 안 된다, 이렇게 모호한 태도는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따위로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해 그 작품을 읽었다는 젊은이들을 자주 봤습니다. 작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치판단과 정치적 시비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어떤 경우에는 시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도 시비에 대한 간섭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사회:그러면 도대체 누가 글을 씁니까?

이:내 아이가 "아빠, 나 글 써볼게요" 할 때 선뜻 "그래, 너 생각 잘했다"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나 논리는 그 자체가 가치판단이나 시비와 무관할 수 없는데, 문학은 바로 그 말과 논리를 기본 장비로 쓰고 있으니까요. 다만 끼어들더라도 어떻게 끼어드느냐가 문제인데,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발언하고 끝내는 것이 작가로서는 최선이고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황:그거 오랜만에 좋은 얘기요. 작품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작가의 현실 참여도 힘이 없고 의미가 없어집니다. 문학을 통해서, 소설을 통해서 발언해야 합니다.

사회:참여의 장이랄까, 방향이랄까 이런 점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황:언젠가 술자리에서 얘기한 적이 있어요.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에는 대가가 없으며, 대가로 거론하는 사람들조차 우리가 볼 때는 별것이 아니라고요. 루쉰(魯迅)이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근대를 뛰어넘는 대가가 될 듯했으나 결국 아시아 작가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괴테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이 세계적인 안목을 갖춘 대가가 나와야 해요.

사회:두 분이 그 임무를 완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황:우리도 좁은 자루 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지요. 세간에서는 이형과 나를 라이벌로 보지만 나는 늘 이형이 든든합니다. 옆에서 누군가 긴장시켜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지요. 나는 이형에게 빚이 있는 셈인데요. 내가 구속돼 있을 때 석방 서명도 해주고, 면회 와서 책도 들여주었지만, 국내외 강연 때마다 '나는 별게 아니고 황 아무개는 정말 훌륭한 작가이니 하루라도 빨리 석방돼야 한다'고 주장해 주었지요. 내 부탁이지만 제발 우리 잔파도에 휩쓸리지 맙시다. 하하하.

이:참여를 외치며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 문학적으로 크게 되기는 어렵지요. 몸으로의 참여, 행동하는 지성-. 그런 거 외고 다니는 사람들치고 큰 작가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사(文學史)에서 그저 고만고만한 자리는 있었지만….

사회:두 분은 자신의 어떤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갑니까?

이:그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황:내가 대신 얘기하면 '사람의 아들'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 양반이 뚝심이 있어서 대중적인 소설도 많이 썼어요. 예를 들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든가 '변경' 등은 대중적 코드에 맞추면서 자신의 인생 문제를 고뇌한 작품이에요. 이문열씨의 좋은 점은 인생파라는 거요, 그래서 자기 안에서 퍼낸 작품이 많아요.

이:황선배께는 손꼽을 대작이 여럿 있지만 내게는 왠지 단편들이 더 인상적입니다. 특히 1970년대 초 단편집 '객지'에 묶인 작품들이 좋았습니다. 내가 아직 등단 전의 문학청년이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책에 실린 작품들은 '섬섬옥수''몰개월의 새' '북망, 그 멀고도 고적한 길'같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도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황:거의가 서로들 초기 작품을 기억하는 편이지요. 장편 얘기도 좀 해주지 그래.

이:보통 한 권에 묶인 10편 가운데 3편 정도가 좋으면 훌륭한 단편소설집인데, 내 기억에 '객지'에는 한 편도 버릴 게 없었어요. 그래서 인상이 강했다는 뜻이지, 선배의 장편이 더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길산' '손님' '오래된 정원' '무기의 그늘' 등 편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 대작이지요. '오래된 정원'은 내 신통 찮은 솜씨로 서평까지 썼고.

사회:'장길산'은 10권으로 이뤄진 대하 소설 아닙니까?

이:내게도 열두권짜리 '변경'이 있는데 그게 묘해요. 물리적인 노동량이 주관적 애정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힘이 들고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에 애착이 간다고 할까. 하지만 대외적으로 그 작품은 없는 것과 같지요.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번역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억지로 번역된다 해도 저쪽은 이미 60~70년 전에 쇠퇴해버린 그 낡은 양식을 끝까지 진지하게 읽어줄 독자가 흔치 않은 세상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근래에 낸 9백장짜리 경장편 '시인'은 달랐어요. 국내에서는 많이 팔리지 않았으나, 외국에서는 그래도 가는 곳마다 재판을 찍었고, 네덜란드와 그리스에서까지 출판됐습니다. 애틋하게 쓰고, 내 삶이 많이 투영돼서 애착이 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나더러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황제를 위하여'가 되겠습니다.

황:그거 좋은 작품이죠. 그런데 내게는 지나간 작품은 솔직히 별 애착이 없어요. 나 스스로 20세기 3부작이라고 칭한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은 밖에 나가서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이 3부작을 마무리하고 '심청, 연꽃의 길'을 썼는데 요즘 이것을 손보고 있습니다.

이:보통 작가들에게는 제일 끝에 쓴 작품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지요.

황:그럼요. 나도 지나간 작품은 독자에게 줘버렸으니 잊고 말아요. 방금 쓴 것만 기억하게 되지요.

사회:청소년 문예지에 나올 법한 질문입니다만 어떤 작가와 작품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이:40대 작가들도 누구한테 영향을 받았느냐고 하면 대답하기 싫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60이 다 돼가는 작가한테 그것을 물으면….

황:나는 거의 대답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95세로 죽은 스테판 하임이라는 독일작가를 재작년에 노르웨이에서 만났는데, 내 '삼포 가는 길' 영어 번역을 읽고 좋다고 하면서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내 체험에서 스스로 배웠다고 그랬더니 곁에서 젊은 외국작가들이 "너 노인네 놀렸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도 노인인데" 하고 받아쳤지.

사회:스승을 자꾸들 숨기시는 것을 보니 대단한 비밀인 모양입니다. 왜 문학을 합니까?

황:나 자신과 남들한테 위안을 주고 싶어서.

이:갈등의 해소나 카타르시스, 뭐 그런 대답이 되겠지만 그게….

사회:우리 문단에서 무엇이 가장 걱정스럽습니까?

황:문학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재능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서로가 경쟁적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각박한 인식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소리를 하는 마지막 세대가 우리 아닌가 싶은데 '문단동네의 의리'같은 덕목을 지켜야지.

이:디지털 문화가 실체의 전쟁이 아니라 이미지 전쟁이듯이, 문학판까지도 본질이나 실체보다는 이미지가 우선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미지가 곧 실체라고 자신 있게 주장되는 시대에 깊이 있는 사유나 진지한 성찰이란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지….

사회:문단에 칭찬할 점은 없습니까?

황:문학판은 무엇보다도 실력 위주로 생존이 판가름난다는 엄정하고 냉혹한 원칙이 서 있지요. 등단할 때 아무리 좋은 작품을 내놓았더라도 뒤에 노력하지 않고 몇 번 태작을 내놓으면 그냥 보내버립니다. 흘러간 자에 대해서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살아 돌아올 때까지 내버려 두지요.

이:예전에는 동료나 후배작가들에게 불평불만이 많았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몇 군데 심사에 관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최근 쓰인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된 덕분인 듯합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또 쓰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황:요즘 젊은 세대가 책을 별로 안 읽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읽을 것은 다 찾아서 읽는 것 같아요. 내가 망명.투옥 거치면서 13년 만에 책을 다시 썼는데, 다들 황석영이 어떻게 살아나겠느냐면서 모두들 갔다고 했다지요. 출판돼서 반응을 보니까 다행이었어요. '오래된 정원'의 경우에 아무 책도 안 팔리던 외환 위기 중인데도 수십만부가 나갔고, '손님' 역시 매우 딱딱하고 어려운 소설인데도 많이 나갔어요.

이:시절이 변해 오히려 황선배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겁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배가 썼다 하면 1백만부는 쉽게 넘겼을 텐데.

황:1989년부터 95년까지가 출판의 전성기라고 들었어요. 이 양반하고 조정래 같은 작가들이 백억대 부자가 됐다지만, 나는 그런 때를 해외와 감옥에서 놓쳤잖아. 하하.

사회:문학과 정치 권력은 어떤 관계여야 합니까?

황:작가라면 정치 권력이나 너무 한쪽으로 힘이 쏠린 곳에 대한 비판을 숙명으로 여깁니다. 문학이 힘 있는 곳과 친화해서는 별로 재미가 없지요.

이:속된 얘긴지 모르겠으나 문학을 관장하는 문화부나 문예진흥원 같은 제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요즘도 본질은 하나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제도권 문인들이 그 권력을 잡았듯이 지금도 정권 친화적인 사람들이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사람은 바뀌었지만 정치권력과 공존하는 기제는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황:허허허. 그것도 상대적인 것이지. 철이 바뀌고 밤과 낮이 오는 것처럼.

03.10.28

 

 

 

5. '삼국지'는 불멸의 역사

"삼국지 주인공은 유비도 조조도 아닌 역사"

“민음사 박맹호 사장님의 권유로 삼국지를 붙들게 됐습니다. 등단 5년째인가 아주 젊고 바쁠 때인데, 나보고 삼국지를 번역해보라고 하더군요. 수호지는 황석영 선배한테, 금병매는 최인호 형한테 맡기겠다고 그러더라고…”이문열씨는 이렇게 삼국지와 인연을 말했다.

이에 대한 황석영씨의 언급은 이랬다. “다 잊어버렸군. 당신이 『삼국지』『수호지』 다 넣어 주었어. 이후 누군가 면회와서 삼국지 번역이나 해보라고 충고를 하는거요. 그래서 시중에 나와 있는 판본들을 걷어다가 모조리 읽어봤어요.” 시리즈 대담 마지막을 장식할 두 사람의 삼국지 얘기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사회:말이 번역이지 토씨만 바꾼 것 아니냐는 시정의 야유도 있는데 왜 '삼국지'를 새로 썼습니까?

황석영:저 양반은 젊어서 했는데 그게 수능 시험하고 맞아떨어져 엄청나게 팔렸다지. 출판계는 장사된다며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나는 사실 번역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감옥 탓이었지요. 집필권도 없이 7년 징역이 4년째가 되니까 못 견디겠더라고. 이 책 저 책 읽는데 그중에 '삼국지'도 있었어요.

이문열:면회 때 나보고 '수호지'를 넣어달라고 했잖아요? '수호지'를 번역하려는지 알았지.

황: 막상 '삼국지'를 읽다보니 번역들이 너무 거칠어. 오류도 많이 보이고. 1년 동안 두권 정도 했나? 시간이 아주 잘 갔어요. 감옥에서 나오자 때려치웠는데, 창비사에서 완성을 해달라고 계약금도 주고 했지. 나도 노후대책이 있어야 하잖아? 그러면 저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서 "나는 그동안 많이 벌었으니, 이제 형님이 하쇼" 이럴 줄 알았는데….

이: 하하하.

사회: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황:나, '삼국지' 얘기 대담서 하기 싫었는데, 남들이 우리더러 담합했다고 할 거 아냐. 그때 나는 아마 광주에 있었을 거요. 당시에는 '장길산'을 썼거나 마쳤거나일 땐데, 하여튼 1980년대란 온 사회 전체가 싸우는 때라서….

이: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는 '미야모도 무사시'를 비롯해 일본에서 인기 있는 역사물을 많이 쓴 작가인데, 어떤 인터뷰에서 자기가 일생 창작한 작품보다 재구성한 '삼국지'가 더 많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충격적이었던 데다 또 박맹호 사장님이 설득합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부업 중에 '삼국지' 번역 만한 것도 없을 거라고. 게다가 그때 경향신문이 파격적인 대우로 연재를 제안했어요. 소설 연재료가 월 80만원일 때 2백만원을 줬으니까. 이렇게 3박자가 맞아서 시작했는데 과연 요시카와의 말대로 됐어요. 1백만부 넘게 판 책이 5종은 되는 내 창작소설 다 합친 것보다 '삼국지' 판매가 조금은 더 많을 거예요.

사회: 최근에도 변동이 없습니까?

이:내 '삼국지'와 다른 삼국지가 택일관계는 아닌 듯해요. 전에도 새 번역이 나올 때마다 덕을 보았는데, 아마도 내 책을 읽은 사람이 다른 사람 것을 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그런 모양입디다. 황선배 덕분에 올해는 일찌감치 70만부를 넘어섰어요.

황:그거 잘 됐네. 이형 물건은 오래된 상품이라 홈쇼핑 할인판매에 힘을 기울이더군. 두 달 동안 내 책도 한 50만부나 나갔으니 시장을 나눠먹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워놓은 셈이지. 최근 잠시 멈칫하는 느낌인데 방학이 되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해요.

사회:두 분이 대본으로 삼은 책이 서로 다르지요?

이:꼭 그렇지는 않아요. 둘 다 모종강(毛宗崗)본인 것 같은데, 나는 모(毛)본을 뼈대로 삼았지만 정사(正史)를 보강하고 다른 저술들을 참조해 재구성을 시도했지요. 그래서 1~2권은 구조부터 다소 다르게 가고, 3~9권은 평(評)과 해설을 빼면 정본과 거의 같습니다. 다시 10권에서는 심한 축약이 있고.

황:사실은 처음 두권은 대만 삼민서국(三民書局) 판이었고 한국판의 원본은 거의 이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뒤늦게 손을 댄 덕으로 상해 강소고적(江蘇古籍)판의 수상삼국연의(像三國演義)로 원본을 바꾸었는데 위의 삼민서국 판의 모종강본 오류를 바로잡은 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형은 평역을 했고. 나는 정본 '삼국지'가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번역을 했어요. 주위 얘기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박태원 삼국지'만한 것이 없다는 거야. 그가 월북하는 바람에 출판사 사장 이름으로, 최영해로 역자가 둔갑하기는 했지만. 이른바 그 유명한 '정음사 판'입니다.

이:나중에 '월탄 삼국지'와 '구용 삼국지'가 가세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박태원 삼국지'와 요시카와 에이지 번역판이 가장 많이 읽혔죠.

황:그렇지. 그 둘이 국내 '삼국지'의 상징이지. '박태원 삼국지'는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문장과 시를 읽는 맛이 기막혀요. 내 책의 경우 시 번역은 자신이 없어서 절반 정도를 하고는 한시 전공자인 임형택 교수에게 보여줬더니 새빨갛게 고쳐온 거야. 이 참에 시는 아주 그 친구에게 맡겨버렸고, 번역을 끝내고 나서 여러분에게 감수를 받았는데 교열을 무려 7번이나 봤어요. 나중에는 아주 신물이 나고, 정말 귀찮더라고. 선금 돌려주고 때려치우고 싶었어.

이:나는 4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으니까 대개는 오류를 그때그때 고칠 수 있었어요.

사회: '삼국지'의 정통성 논란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조조 정통성을 일본 관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는 물론이고, 중국의 정사(正史)는 거의 전부가 조조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요. 나관중(羅貫中)을 비롯한 원말 명초의 연의(演義) 작가들과, 송대에 대의명분을 중시한 주자학자들을 빼고는 유비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적이 별로 없어요.

황:물론 사서를 썼던 진수가 조조의 위를 이어받은 진에 봉사한 사관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나관중이 소설로 쓸 때에는 원말 명초이니 몽골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개국하려는 열망이 담겼고, 모종강이 쓸 때도 이민족인 청나라가 지배하던 시기 아닙니까? 한족 정통성을 향한 강한 민중적 열망이 담겨 있었다고 봐야죠. 그러니 소설에 유비 위주의 촉한 정통론이 스며든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 같아요. 그런 의식은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세계 각처의 화교 동네에서 관우와 세 형제의 사당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사회:어느 인물 위주로 '삼국지'를 쓰셨습니까?

황:정통성이니 주인공이니 하는 말이 싫은 것은 조조든 누구든 그들 나름대로 특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삼국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없다고 말합니다. 굳이 주인공을 따진다면 '삼국지'의 주인공은 역사일 뿐입니다. 거기 나오는 인물 중에 과연 누가 성공했습니까. 도도한 역사 앞에서 다 실패했죠. 젊었을 때는 '삼국지'를 영웅 중심으로 보는데, 나이 들어서는 전체의 흐름을 보게 되지요.

이:대만대학에서 '삼국지'를 전공하는 우훙이(吳弘一) 교수를 누가 소개해줘서 만났어요. '삼국지' 소설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고 했더니 그 사람 말이 두 가지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합디다. 먼저 촉한 정통론을 건드리지 말라더군요. 적어도 연의에서는.

황:이형이 뭐 건드린 거 없잖아?

이:또 하나는 관우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였는데, 나도 그 두 가지를 지키려고 애썼어요. 조조를 조금 올려놓았으니까 상대적으로 촉한 정통성이 약화된 듯 보일 뿐이지.

황:유비도 흉측하지. 조조와 밥먹다가 천둥친다고 젓가락 떨어지는 장면, 백만 대군을 헤치고 조자룡이 품고 온 아두를 내던지는 장면 등 음흉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지요. 반면 조조는 담백해요. 나는 그 장면이 좋더군. 죽기 전에 후궁들 모아놓고 선물로 향 하나씩 나눠주면서, 너는 바느질을 잘하니까 바느질해서 먹고살아라 따위로 당부하는 장면 말이야.

사회: 민중사관으로 기우는 황선생님이 유비 정통성에 안주하고, 보수사관으로 기울 것 같은 이선생님이 조조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 다소 의외라는 생각인데요.

이:당대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었느냐, 그것을 정통의 기준으로 보면 될 텐데…. 또 조조가 반드시 민중의 적은 아니지요. 유비도 황실의 종친이라지만 사실은 장돌뱅이고.

황:그렇게 보면 유비 측이 조조나 손권에 비해 제일 아래 계층이지요. 몰락 선비나 저자의 무뢰배 출신들이었으니까. 민중사관이니 뭐니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원본의 정신을 살피다보니 우리 요즘 입맛에 맞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글맛이 나게 하면서 시나 주석이나 원본에 충실했지요.

사회:'삼국지' 작가에게도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장면 같은 것이 있습니까?

이:두 친구가 밭을 가는 도중 금덩어리가 나왔는데, 하나는 그것을 만져보고 던지고 다른 하나는 만져보지도 않지요. 만지지 않은 친구가 만져본 친구를 경멸하는 장면이 있지요?

황:또 있어. 글을 읽는데 밖에 행차가 요란해요. 한 친구가 일어서서 그 행차를 내다보니까 그대로 글을 읽던 다른 친구가 너는 명리를 추구할 놈이라면서 절교하지요.

사회:관녕과 화흠 이야기 같은데, 화흠은 나중에 조조한테 벼슬해서 제위 선양-실은 찬탈-에 앞장서지요.

이:젊어서 읽을 때는 그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번역할 때는 이미 지겨운 일이 돼버려서 감동이고 인상이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지만.

황: 제갈량이 출사표 내는 장면도 근사해. 후주 유선이 크게 모자라는데도 유비 생전의 약속 때문에 그를 지키지요.

이:어떤 이는 그 '탁고(託孤)'를 두고 유비가 공명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해요.

황:출사표에 보면 그런 인간적인 고뇌가 보이지요. 오장원에서 죽을 때도 아주 비장하고.

사회:'삼국지'에서 가장 근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황:시대마다 바뀌는데 요즈음 나는 주변 인물에 흥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강유 같은 사람이지요. 제갈량에 반해 조조한테서 넘어온 사람인데, 촉이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자결하는 비운의 인물이지. 물론 제갈량이 으뜸이지만.

이:소설적으로 잘 창조되기는 조자룡이 아닌가 싶어요. 정사에는 아주 짧게 나와 허구로 창조된 인간이란 폄하도 있지만, 연의 '삼국지' 전편에 걸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빠짐없이 갖춘 인간이 아닌가 해요.

황:촉의 오호 장군 중에 막내지요? 조자룡은 제갈량 사람이야. 장비는 경계할 인물이 아니었으나 관우는 달랐지요. 관우는 견제하면서도 제갈량이 가장 믿는 사람이 조자룡이었어.

사회:두 분의 오류와 오역을 자세하게 지적한 중국 조선족 평론가의 책과 글이 나왔는데 혹시 읽어보셨습니까?

이:그의 지적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굉장히 고맙게 봤어요. 번역을 해보면 몰라서 틀린 것도 있고, 틀린 줄도 모르게 틀린 것도 있습니다. 그가 오류라고 지목한 9백여곳 중에 32개는 온당했고, 그래서 즉시 그대로 고쳤습니다. 곧 그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교정판을 한질 보내줄 작정입니다.

황:오류가 있다면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 고쳐야지. 창비 편집부와 협의해서 즉시 바로잡겠습니다.

사회:'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약속과 의리를 지키고,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것 아니겠어요? '삼국지'를 보면 이건 오늘의 누구 같고 저건 누구 같은데, 그렇다고 '삼국지'를 무슨 서바이벌 게임 교본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이야. '삼국지'는 동아시아 3국의 공동 재산이 되어야 해요.

이:교훈은 역사적 관점에서 찾아야 하는데. 역사가 반복된다면 '삼국지'는 좋은 교본이 될 테지만, 어떤 논의들은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어요.

황:'삼국지'에 허무주의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세월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 자체가 허무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역사의 덧없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더욱 최선을 다하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03.10.29

 

 

 

대담 뒷얘기

이념 성향 다른 두사람 '아버지'화두로 가까워져

이 시대 문단을 대표하는 황석영(60)과 이문열(55) 두 사람을 한자리에 초대하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념적 지향점의 간극도 그렇지만 특히 황석영씨의 '삼국지'가 나온 직후라 책 홍보 이벤트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씻지 못했다.

끈질긴 권유에 두 사람은 의견을 모았다. 막상 말문을 트고 나니 자리를 만들기 전 걱정은 모두 기우였음이 확인됐다. 두 사람을 붙들어 매놓은 끈 중의 하나는 '아버지'였던 것 같다.

6.25 때 월북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1999년 두 차례 중국을 찾았던 李씨는 끝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픔이 있다. 불법 방북 후 외국을 전전하던 黃씨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93년 두 사람은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다. 李씨는 북한을 체험한 黃씨를 만나 아버지 얘기를 나누던 끝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黃씨는 대담 첫머리에서 그런 점을 의식한 듯 "이 사람이 가족 얘기나 속얘기를 나한테 많이 합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李씨가 이념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애틋하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문학과 아버지'의 문제가 대담 중간 화제가 됐다. 黃씨가 먼저 "생전 이문구하고 얘기하다 보면 유복자의 경우와 어린 나이일지언정 아버지를 봤던 경우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黃씨가 보기에 소설가 김원일은 한참 '아버지'라는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어떤 나이에 용서를 한 경우다. 黃씨는 "김원일의 소설이 그런 점에서 따뜻하다"고 말했다.

이문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을 경우 어머니가 매를 들면서 '네 아비도 나를 힘들게 하더니 너까지 그러느냐'고 화내시곤 했다는 얘기를 黃씨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문구에게는 싫으나 좋으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이다.

黃씨는 "李형의 소설에서는 늘 어떤 아버지의 그림자가 회한처럼 비친다. 뉴욕에서 만났을 때도 내가 '여보, 당신 아버지가 월북했을 때 지금 당신보다 나이가 젊다. 아버지 용서하고 놓아주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을 꺼냈다.

李씨는 "아버지 문제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빨리 아버지와 작별했다. 아버지와 화해했다기보다 무관해진 상태"라고 답했다. "더 이상 잘잘못이나 선악을 따져보고 싶지 않은 상태, 특별한 애정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원망도 없는 상태다. 아버지가 가족을 남기고 월북할 때 서른일곱이었다.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먹은 내가 아직도 거기에 매여있다면 어찌 보면 곤란한 것 아니냐"라는 것이다.

李씨는 "오이디푸스 얘기가 단순히 희랍신화에 나오는 사건이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아버지를 지워버리는 시기가 오는데 그것을 문학적으로 상징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